티스토리 뷰

양자역학의 역사

 양자역학은 1900년 실험을 통해 알고 있던 흑체복사의 자외선파괴를 해결하여 에너지밀도의 주파수에 관한 함수를 도출하기 위해 플랑크가 양자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때 양자역학 기본 상수 중 한 가지인 플랑크상수가 최초 등장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에너지가 양자로 구성되었다는 가설을 세웠으며 이때 최초로 광전 효과에 관해 설명을 하게 된다. 양자 가설을 활용하여 고체 비열의 온도에 대한 의존성을 설명하였으며, 1912년 앙리푸앵카레가 집필한 논문에서 양자화의 정의를 논하여 힘을 실었다. 1926년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양자역학 수학적 기초가 파동역학과 행렬역학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로 제안되었다. 1932년 폰노이만은 양자역학을 수학적 공식화를 정립하였으며, 연이어 40년대에는 파인먼과 다이슨 등에 의해 양자전기역학이 최초 성립되었다. 양재색역학은 1960년도 초 시작되었다. 현재 알려진 이론은 폴리처와 그로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1975년도에 완결되었다.

양자역학의 형성기 

 1차세계대전 종료와 더불어 물리학계의 비약적 발전이 시작된다. 1918년 노벨상은 독일 물리학자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 독일을 중점으로 양자론이 진보하였다. 주요 중심지는 코펜하겐을 비롯한 뮌헨과 괴팅겐이며 그밖에 취리히, 베를린 등이었다. 이 형성기는 젊은 세대의 활약이 돋보였다. 양자역학의 형성은 두 갈래의 길로 나아간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모형에서 출발한 대응원리에서 행렬역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자로 비롯하여 루이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거쳐 도달하는 피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두 가지 길은 형성과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훗날 같은 내용임이 증명되었으며 통일체로서 양자학으로 재정립된다. 양자역학의 형성이 통일될 무렵, 물리학은 새로운 단계에 이르게 된다.

양자역학의 성립기

 파동역학과 행렬역학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시작하였으나 최종 목적은 일치했다. 에르빈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으로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동등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폴디랙과 파스쿠알요르단은 변환이론을 성립하였으며, 이로써 두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 양자역학이 성립하게 된다. 양자역학의 형식은 물리적 해석에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았다. 파동의 개념에 대해 파동역학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이것 또한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된 것이 증명되었다. 이로써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은 양자론의 개념을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확실해졌으며 1927년 베르너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등장하게 된다. 파와 입자 두 개의 상을 결부하여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대입하여 양자역학의 일관적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였으며, 같은 해 상호보완성원리를 정립하였다. 시공적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에 서로 배제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하여 품었지만 한편으로 신박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 사상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었다.

 

양자역학과 우주